회피형남자D 6편: 신뢰(1)
(1편이랑 순서가 이어짐)
본인을 꼭꼭 숨기는 그에게 물어봤다.
“영원히 너에 대해 안 가르쳐줄거야?”
“언젠가는 알려주겠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냥 딱 잘라 안 가르쳐주겠다고 했다면 더욱더 빨리 손절할 수도 있었다. 사실 초반에도 얼마든지 그와의 이야기를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궁금했다. 그녀의 추리에 정답이 있었는지. 다들 그가 의사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i는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을 받은 덕분에 친구들 대다수가 판검사변호사의사 등 전문직에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귀동냥으로 많이 들은 결과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혹시 이쪽 업계에 계세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의사와 다소 긴 기간 사귄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의사들만 아는 은어나 의학/약학 용어에 일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익숙했다.
이상하게 다른 직업들보다 특히 의사나 의대생을 사칭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전문용어나 약의 용량까지 숙지하고 있어서 가끔 그녀도 속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의료업계는 좁아서 대충 몇 가지 인적사항만 알아도 업계 관련자는 사칭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얼마전 클럽하우스에서 S대 의대생을 사칭했던 남자의 경우에 그녀가 S대 의대생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건물번호를 물어보았는데 사칭 준비가 덜 됐는지 당황하며 입학하고 줌 수업만 해서 몰랐다고 둘러댔다. S대 의대 교수 중에 그녀의 친구가 있어 그의 이름을 댔더니 그런 학생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i는 얼마나 S대 의대를 다니고 싶었으면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닐까 싶어 마음이 짠했다. 자존감이 바닥인 사람들이다. 자존감이 바닥이라 두꺼비처럼 배를 부풀려서 크게 허세를 부리고 싶은 것이다.
처음 그가 의사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그가 의사들이라면 당연히 아는 은어를 못 알아들었을 때였다. 미국의사는 알아듣던데 호주의사는 좀 다른가? 아니면 지금 폴리클(학생실습)을 뛰고 있는 걸까? 어찌됐든 i는 그가 의사이든 아니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그가 의사라고 하든지 다른 정보들은 일체 모르고 그저 교포인 것만 알았으니까. 심지어 그녀는 어려서부터의 인맥덕분에 주변에서 잘 생긴 의사 정도는 쉽게 만날 수 있었기에 그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밝힌 의사라는 사실을 왜 i 에게만은 못 밝힐까 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이 사실 때문에 그가 하는 일체의 언행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정신과전문의인 그녀 친구의 말을 빌어보자면 진리는 오캄의 면도날처럼 간단하고 단순하여 본인이 의사이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의학관련 용어들을 써가면서 내가 뭔지 맞춰보라고 직업을 굳이 숨기는 의사는 없다는 것이다. “난 말한 적 없는데 니가 의사라고 넘겨 짚었잖아”라고 정당화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
또한 정말 상대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회피성이나 다른 성격 장애에 속한다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i가 클럽하우스에서 알게 되어 가장 많이 만나고 연락을 주고 받는 A는 처음 그로 인한 답답함을 호소할 때 그녀가 상대방의 속도에 맞출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으나 2달 동안이나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라고 답했다. 이 이야기를 D에게 하자 그는 A를 핑해보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왜일까?)
그녀가 그를 언팔하고 그 사실을 서로의 맞팔인 B와 C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의외의 답변을 얻었다. 그들은 D라는 사람 자체는 비호감이지만 그래도 둘이 서로 말이 잘 통했던 것 아니냐고, 그리고 D에게 마음의 상처라든가 트라우마가 있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일방적으로 i가 언팔해버리면 그는 더 상처를 받게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D를 싫어하고 욕했던 사람들인데 D를 두둔했다. i는 그 정도로 심각하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그녀에게 딱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했을 뿐.
그러나 i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춰주는 순종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짓지 않았다. 클럽하우스에도 결이 맞거나 혹은 전혀 다르더라도 이 사람과는 잘 지낼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들면 연락처를 교환하고 오프라인에서 가끔씩 만나 근황을 주고 받곤 했다. 두 달 가까이 그에게 맞춰줬으니 어느 정도 그쪽에서도 타협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팔하고 며칠 동안 고민한 결과 그녀는 다시 그를 팔로우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는 왜 언팔했고, 왜 다시 팔로우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언팔을 당했지만 본인은 꿋꿋이 팔로우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누가 대인배인지 보라며 하하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