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요즘 지쳐 있었다.
눈 감고 자신의 지난 삶을 생각해본다.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삶이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레이시아 국제학교를 다니다가 캐나다로 넘어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고 그리고 다시 호주로 와서 의전원을 다녔다. 캐나다에서 의대(캐나다는 모두 의전원이다) 입학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의사의 전망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캐나다에서 의사가 되어도 다들 미국으로 건너갔고 의대 수가 적어서 입학이 어려워 찾다보니 그나마 입학이 비교적 쉬운 호주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전원을 다니며 수련할 때에도 여기저기 옮겨 다녔어야 하는데 GP를 따고 나서도 호주에서는 외국 국적의 의사들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인턴십을 구할 때도 애를 먹어야 했고 10년간 깡시골에 살며 봉사해야 메디케어 수급자격을 받을 수가 있다. 그래서 그동안 카테고리 2-5에 해당하는 시골을 전전했다. 호주 시민권을 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일이었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호주는 의사수급이 넘쳐나서 예전처럼 의사란 직업만을 가지고 영주권 따기조차도 쉽지 않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닌다는 것은 생각만큼 멋진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과 조금 친해진다 싶으면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언젠가부터 어차피 헤어질 사람에게 정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했다. 하지만 외로웠다.
클럽하우스라는 앱을 알게 된 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한국계지만 해외로 이민했거나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 군대 문제 때문에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하고 한국 국적을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속엔 언제나 한국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있는 방에 들어와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여자가 있었다. 프로필을 보니 다개국어를 할 줄 알고, 해외여행을 많이 한 듯 보였다.
그는 레몬스퀴저에 생긴 이상한 물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어떻게 닦아내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방에 10명이나 되는데 아무도 답이 없었고 한 명만 베이킹파우더를 써보라는 가벼운 충고를 했다. 그 때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건넸다.
S”호주 사신다 그랬죠? Woolworths에 레몬즙 따로 팔아요. 힘들게 쥐어짤 필요 없어요.”
H”호주 사시나요?”
S”아뇨. 예전에 살았었어요.”
어느 날 일을 끝마치고, 그녀가 말한대로 근처 마트에 가서 레몬즙을 찾아봤다. 진짜 있었다! 집에 가서 샐러드에 레몬즙을 몇 방울 뿌려봤다. 그런데 생 레몬을 짜먹는 맛과 전혀 달랐다.
그녀에게 이야기해야겠어. - 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녀가 접속해 있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그 날이 시작이었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를 경계했다.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게 개방적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얼버무리며 20대에요 30대에요 라고 말했을 나이도 또박또박 제대로 알려주었다. 그녀에게 연애경험을 물었을 때 가감없이 이야기해주었다. 인터넷하다 만난 전남친의 이야기라든가, 왜 헤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연하남의 이야기라든가. 이야기를 듣다보면 꾸며낸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있었다. 신기했다.
H”연애경험이 많으시네요.”
그녀는 그의 발언에 짐짓 당황한 것 같았다.
S”이 나이 정도되면 이 정도 연애경험은 다 있지 않을까요?” 라고 그녀는 반문했다.
그게 대화의 시작이었다. 그 날 이후 둘은 매일 같이 대화를 했다. 처음 그는 운동을 가야한다며, 혹은 일을 해야 한다며, 시간을 제약하며 그녀와 대화했다. 그런데 그녀의 다양한 경험과 박식한 지식 수준 때문에 대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에게는 항상 루틴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그녀와 이야기하고 나서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운동 가기보다는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주말에 나가야 할 때도 그녀와 이야기하다보면 차츰 지각할 뻔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운동 갈 때도 차를 수리하러 갈 때도 카페에 갈 때도 일을 하러 갈 때도 운전 중에도 그녀와 이야기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그의 이성은 클럽하우스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클럽하우스를 찾아 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H”감기 걸렸어요??”
S”몸은 별로 안 아픈데 찬 바람만 쐬면 자꾸 기침이 나오네요.”
한국은 여름이었다. 그녀는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기침을 할 때마다 꿀꺽거리며 물을 마셔댔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는 그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깼는데 아직도 그녀는 그 방에 있었다.
S”신기하네. 코 고는 소리 들으면서도 잠 들다니.”
H”내가 코 골았어요?”
S”네 ㅋㅋ 그리고 어제 잠꼬대했는데 기억나요?”
H”뭐라고 했는데요?”
S”뭐라고 중얼거리길래 뭐라고 하냐고 물어보니 항생제 바꿔먹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이젠 꿈에서도 내 걱정 해주는 거에요??”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코를 골다니 정말 피곤했나보다. 요즘엔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다. 자다가 깨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잠들고의 연속이었다. 자고 싶지 않았다. 중간중간 깨서 그녀에게 이야기하면 그녀는 늘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늘 내게 재밌다,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기분은 좋았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날은 그녀와 여행과 같은 가벼운 이야기나 경험담을 이야기했고, 그는 한국과 호주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끔씩은 읽은 책 이야기를 했고, 또 그녀의 몸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3주간 병원에 다니며 항생제를 복용했지만 상태가 좋아지기는 커녕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S”아무래도 대학병원에 가야겠어요. 코로나도 아니고 항생제로 안 낫는 걸 보면 g.e.r.d 일 수도 있지 않을까?”
H”그런 걸 어떻게 알죠? 의료 쪽에서 일하시나요?”
그는 흠칫 놀라 그녀에게 물어봤다.
S”아뇨?!”
H”그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S”전남친 중 한 명이 의사였어요. 그 땐 의대생이었지만. 같이 공부하면서 어깨 너머로 저도 배웠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GERD의 발음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H”gastro-esophageal-reflux-disease”
S”gastro-esophageal-reflux-disease”
그녀는 그의 발음을 몇 번이고 따라 했다.
그리고 그 날 대학병원에 다녀온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S”세 명의 의사나 오진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네요. 역시 목감기가 아니었어요.”
H”뭐였는데요?”
S”Laryngopharingeal reflux disease. 잘못된 처방 때문에 더 상태가 안 좋아졌던 거라고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의학용어를 말했다. 뭐지? 나에 대해 눈치 챈 건가 아니면 이쪽 업종에 종사하는 건가?! 그리고 보면 그녀는 대화하다가 필요이상으로 많은 의학용어를 알고 있었다. 거의 정신의학 용어이긴 했지만… autism, Asperger’s syndrome,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obssesive compulsive disorder,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amnesia, avoident personality disorder… 모두 그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나온 단어였다.
H”클럽하우스에서 그쪽 같은 사람 처음 봐요!”
S”나같은 사람? 나같은 사람이 어떻길래요?!”
H”You are such a smart cookie! Smart cookie란 말 알아요?!”
S”네 알아요. 근데 클럽하우스엔 저보다 똑똑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걸요. 전문가들도 많고요.”
H”아니에요. 제가 클럽하우스에서 본 사람들은 음… 거의 안 똑똑했어요. 내가 본 중에 제일 똑똑한 것 같아요.”
그녀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 기분이 좋았다. 예쁘다는 말보다 똑똑하다는 말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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